공덕역 근처에서 약을 타 오던 날의 기억

공덕역 근처에서 약을 타 오던 날의 기억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상

어느 날부터인가 공덕역 5번 출구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출퇴근 길인데, 그날따라 유난히 그 계단들이 높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사실 그때 나는 마포구 쪽의 한 정신과를 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잠을 잘 못 자서, 혹은 가끔 찾아오는 이유 모를 불안함 때문에 가볍게 시작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상담을 받고 약을 처방받아 들고 나오니 기분이 묘했다. 이게 정말 필요한 과정인가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진작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저 아메리카노 한 잔 사 들고 습관처럼 공덕역 근처 빵집에 들러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 소소한 일상이 사실은 버티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정신과 약을 먹으며 겪은 변화들

솔직히 처음에는 약을 먹는다는 게 조금 무서웠다. 공황장애 약이나 수면 관련 약들을 검색해보면 다들 ‘부작용’이나 ‘의존성’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들을 앞세우니까. 그런데 막상 처방받은 약을 매일 챙겨 먹다 보니 거창한 변화가 생기기보다는 그냥 멍한 시간이 조금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늘 마음만 챙기지 말고 몸을 챙기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철학적인 조언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정말 단순한 이야기였다. 밥 잘 먹고,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여야 정신이 덜 꼬인다는 뜻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예전에 정신과 약에 의존하며 힘겨워하시던 모습이 떠올라 더 겁을 먹었던 것 같다. 그때는 약만 먹으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사실 약은 그냥 발밑을 조금 편하게 해주는 지팡이 정도였다.

상담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의 공기

한번은 상담 시간이 꽤 길어졌다. 진료비는 대략 3만 원에서 5만 원 사이였던 것 같은데, 상담 시간까지 합치면 그보다 조금 더 나올 때도 있었다. 상담실 문을 열고 나오면 복도의 공기가 늘 낯설었다. 내가 방금 했던 말들이 정말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면 그냥 내 넋두리를 들어준 것뿐일까 하는 찝찝함이 남기도 했다. 가끔은 은평구에서 여기까지, 혹은 반포에서 여기까지 굳이 와야 하나 싶다가도 막상 그곳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조금 진정되긴 했다. 의사 선생님의 표정은 항상 건조하고 사무적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나한테는 편했다. 너무 다정한 위로는 왠지 더 부담스러웠을 테니까.

도심 속에서 나를 마주하기란

지하철역 근처 정신과라는 게 참 역설적이다. 세상에서 가장 바쁘고 정신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바로 옆에, 마음을 멈추고 쉬어가는 곳이 있다는 게. 출근 시간 공덕역은 정말이지 아수라장이 따로 없는데, 나는 그 소란함 속에서 오히려 내 속도를 찾으려 애썼다. 사실 지금도 완벽하게 괜찮아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어떤 날은 잠을 설치고, 어떤 날은 예고 없이 불쑥불쑥 부정적인 생각이 치고 올라온다. 다만 예전처럼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하고 자책하는 시간은 좀 줄었다. 그냥 ‘오늘도 약 먹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지하철을 탄다.

정리되지 않은 마지막 생각들

가끔은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 아닌가 싶어 병원을 끊어볼까 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막상 약이 떨어져 갈 때가 되면 불안해지는 건 여전하다. 이게 의존일까, 아니면 그냥 안정을 찾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일까. 사실 정답을 내릴 필요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답을 구하게 된다. 아마 다음에 또 병원에 가게 되면 이번에는 조금 더 담담하게 의사 선생님께 내 일상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날이 언제일지, 혹은 이제 안 가도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이 비어있는 공덕역의 공기가 조금은 덜 무겁게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