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던 오후
병원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대충 집에서 지하철로 네 정거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정신건강의학과였다. 예약은 진작에 잡았는데 막상 당일이 되니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망설이다가 결국 늦게 도착했다. 5층이었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묘하게 조용한 복도가 나타났다. 다른 병원들이랑은 다르게 간호사 분들이 유난히 나직하게 말씀하시는 게 느껴졌다. 접수처에서 건네받은 문진표를 작성하는데 문항이 생각보다 많아서 좀 당황했다. ‘최근 2주간 잠은 잘 잤는가’, ‘스스로 가치 없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같은 것들이었는데, 그냥 체크하다 보니까 내가 지금 이걸 왜 쓰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펜을 멈추고 멍하니 있었다. 10분 정도 대기했나,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호명되길래 나도 이제 곧이겠구나 싶어서 괜히 가방 지퍼를 몇 번이나 열었다 닫았다 했다.
검사비용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처음에는 종합심리검사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용이 얼마나 나올지 걱정이 많았다. 인터넷에서 대충 찾아봤을 때는 몇십만 원 단위라는 이야기도 있고, 그냥 약만 타 먹으면 며칠 치 약값 정도만 나온다는 말도 있어서 가늠이 안 됐다. 상담을 시작하기 전에 데스크에서 대략적인 안내를 들었는데, 당장 검사를 권유하지는 않아서 조금 안심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상담 진료비랑 약값 포함해서 첫날 4만 원 정도를 결제했다. 사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막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라는 게 솔직한 감상이었다. 다만 이게 1회성으로 끝날 게 아니라 계속 다녀야 하는 거라면 매달 나가는 지출을 무시할 순 없을 것 같아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계산기를 몇 번 두드려보기도 했다.
상담 선생님과의 어색한 대화들
진료실에 들어가서 앉았는데, 의사 선생님이 생각보다 젊으셔서 약간 의외였다. 나는 좀 나이가 지긋하신 분을 상상했었나 보다.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을 물어보시는데, 막상 말하려고 하니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앞뒤 다 자르고 결론만 말하게 됐다. ‘그냥요, 다 그냥 그래요’라고 대답해놓고 속으로 내가 생각해도 참 답답한 대화방식이라고 자책했다. 선생님은 계속 메모를 하시면서 차분하게 듣고 계셨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좀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뭔가 내가 횡설수설하는 걸 다 기록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더 긴장하게 된 것 같다. 중간에 SCT 검사지 같은 것을 집에서 해오라고 숙제처럼 주셨는데, 막상 집에 오니 펼쳐볼 엄두가 안 난다. 다 적으면 내 속마음이 너무 투명하게 공개되는 것 같아서 솔직히 꺼려진다.
결국은 다시 일상으로
상담이 끝나고 나오는데 다리에 힘이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병원 문을 열고 나오니까 바로 옆에 큰 마트가 보였는데, 평소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장을 보고 지나다니는 걸 보면서 기분이 묘했다. 나만 뭔가 다른 세상에 있다가 다시 섞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처방받은 약은 그냥 소화제나 비타민처럼 봉투에 담겨 있었는데, 이걸 먹으면 정말 어제까지의 나랑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해결된 기분도 아니다. 그냥 병원이라는 곳을 한번 다녀왔다는 사실만 남았다.
다음 예약을 고민하는 이유
약 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 이틀이 지났다. 아직 한 번도 먹지 않았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 내가 정말로 문제가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혹은 약 기운에 의존해서 감정이 무뎌지는 게 싫어서 선뜻 손이 안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음 주에 다시 방문하기로 했는데, 사실 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냥 가지 말고 집에 있을까, 아니면 그냥 상담만 받고 약은 안 먹겠다고 말해볼까. 별것도 아닌 일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갈팡질팡하는 마음으로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일쯤 되면 또 마음이 바뀔지 모르겠다.
SCT 검사지를 집에서 해오라는 숙제가 좀 억지처럼 느껴졌어요. 솔직히 그 질문들만 생각하면 오히려 정신 건강이 더 걱정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소화제만 먹는다고 확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상담 후 그런 평범한 풍경이 신기하게 느껴지네요.
지하철에서 묘하게 조용한 복도를 보면서, 어쩌면 제 삶의 흐름도 좀 더 차분하게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나 봐요.
SCT 검사지를 집에서 해오라고 하셨다니, 오히려 제가 제대로 읽고 이해했는지 의문이 드네요.